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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언어학적 배경과 목은 이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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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망 작성일25-11-14 14:12 조회114회 댓글0건

본문

조선시대 기록에는 고려의 대 학자 이색 선생의 기록도
불교계의 연구와 노력도 기록이 없어서 역사의 야사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우리는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목은 이색 선생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과 시대적 사명의 큰 뜻을 새기며 그 시대에 이룩한 훈민정음 창제의 언어학적 혁신은
단순한 문자 발명의 사건이 아니라, 높은 철학과 정교한 논리학, 수학적 기술로 잘 짜여진 인류 최고의 인문학적 발명 혁신이며
언어 문자 연구의 1000년 노력과 동서 문명 교류와 축적된 인간의 연구와 인간의 소리에 대한 관점을 바꾼 첨단 언어학 연구의 결정체였다.
언어란 소리를 통한 신호의 전달과 그 소리의 기준 규정을 정하는 정음, 정음의 위상을 시각적 표현하는 언문, 문자 기호
그리고 본능과 일상, 경험에서 축적된 정보 지식의 사전과 의도를 담아내는 문자 문법 기술로 구축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은 다 모여야 하나의 정보 전달 체계가 구축되는데 이런 복잡성 때문에 체계적 연구도 어렵고 기술적 분화 개선도 힘든 상황이었다. 


1. 인도어 문명에서의 언어학적 원류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어 경전인 《리그베다》에는 이미 ‘소리(聲)’의 개념과 예시가 나름의 체계로 제시되어 있다.

이런 예문은 8장의 구전 정보로 전승되어 오다가 문자화 되는데  불교의 제3차 결집(기원전 3세기경) 이후 팔리어와 브라흐미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후 한자 문화권에서는 갑골문 등 상형 문자체계가 발전하고 그 발음 규칙의 교육과 분류를 위해
 반절법(反切法), 성운학(聲韻學), 절운(切韻) 등의 연구가 발전하며 음절·음소에 대한 다양한 분석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후대의 138 성운 체계, 한자 부수 체계를 발전시키고
한국의 삼국시대 이후 , 한자어를 보조하는 구결,·이두,·향찰 등의 표기법으로 이어졌다.


2. 동북아 언어기술의 전개


한자 관련 연구 기술 개발은 한, 수, 당 제국을 거쳐 8세기 거란의 ‘소자(小字)’는 음절 표기의 중요성을 부각한 혁신적 문자였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성장은 언어학적 대전환의 시대를 열었다. 7세기경부터 개발 보급되던 티벳문자의 연구를 이어서 

쿠빌라이 칸은 제국의 통일을 위해 파스파 문자를 제정·보급하고, 각 지역의 학문과 문헌을 집대성하여 **남경문서고(南京文書庫)**에 봉인하고
파스파 문서를 표준으로 출판 보급하였다.

파스파 문자는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니라, 제국 내 표준 교육·행정·과거시험용 문자로 기능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 언어 정책이었다.

고려 또한 이 체제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과 행정이 몽골에 복속· 학습되었다. 


3. 고려 학문과 원제국의 언어학적 교류


쿠빌라이 칸은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준 충렬왕을 후대하고, 충렬왕의 청을 들어 고려의 학문 진흥을 위해 배 세 척 분량의 문헌을 하사하였다.

비록 태풍으로 운송중 수장되었으나, 이후 추가 문헌을 개경의 집현전 전신 문서고에 봉안케 하여 언어학적 교류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 고려 유학자 **이곡(李穀)**은 원의 한림원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기반과 고려의 선진 유학 발전에 기여했고, 

그의 아들 **이색(李穡, 목은)**은 원제국의 대학자들과 교류하고 학문과 언어 기술을 깊이 익혀 귀국 후 국학 재정비와 시무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인도 승려 지공(指空), **나옹(懶翁)**과 교류하며 불교와 언어의 관계를 연구했으며, 주자학과 불교학을 아우르는 국제적 시야를 지닌 학자였다.

부패한 무신정권의 혼탁과 불굑계의 타락, 학문적 후진성에 대한 개혁을 위해 국학의 교육을 강화하고 

많은 신진 혁신 사상가를 길러냈다. 삼은의 길재와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신미대사의 외조부 이행 등이 정치 경제를 주도한 인물들이고 

나옹화상, 지공선사와 전국 10대가람을 증수 혁파하여 수만의 승려 대중을 결집하고 교육 혁신적 대중 교화를 독려하였다. 


4. 고려 말 불교의 언어학적 실험


삼국 시대 4세기경 불교전래후 불교계에서는 경전 연구를 위해 **범자(梵字)**와 한자의 교육를 주력했고 

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7세기 설총의 이두를 필두로  구결 및 향찰 들릐 다양한  표기법을 개발 사용했었다.  

그 수준이 세계 최고고 일본에도 전파, 구결 기술이 일본 가나 표기법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임. 

한국어와 중국어 산스크리트어가 다르고 한자 표기만으로는 

복잡한 한국어 지식과 문법 어휘가 표시되기 어려워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든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대학자 목은 이색, 나용화상, 지공선사의 탁월한 철학과 최고의 언어학 연구 기반은 

경전 연구와 교육 대중 교화에서 언어 체계 표기법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교육하였으며

전국 10대 가람에 결집된 탄압받던 승려 혁신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현실 타개의 혁신 방안으로 다양한 연구와 실험이 소외된 집단의 가람을 통해 진행되었다.

특히 **함허 득통대사(咸虛得通)**는 금강경오가해 주석 등 다수의 불교 문헌을 번역, 저작하고 

대중 포교 및 보급의 과정에서 이미 연구 개발되고 실험 중이던  소리 중심의 표기를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표기는 후대 훈민정음의 음운 표기 원리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이런 연구는 사찰에 고립되고 탄압받는 불가의 연구자들에겐 현실을 극복 탈출한 학문적 연구로 

더욱 고도화되고 실험은 끝없이 이어지고 완성되어갔다.


5. 조선 초의 전환기와 세종의 고심


조선 건국 후 불교 탄압이 극심해지고, 사찰과 경전이 파괴되는 가운데도 탄압받고 차별받는 일부 승려들은 언어의  연구에 집중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세종의 형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며 세종의 배려로 붕교계 행정을 총괄하고 불교의 입장을 대변할 도제조 직위에 봉해진다.

불교계의 참상을 조사하고 각처의 가람을 살피던 과정에서  이들의 연구를 접했고, 불교계 내부에 전승되던 독자적 표기 체계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높은 경전 지식과 예술적 재능을 가진 효령대군은 그  실체를 깊이 조사하고 책임자들을 추적 연구의 중요성과 완성도를 파악하고 감탄하고 자신도 깊이 연구에 참여한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가 장악한 위험한 정치 상황에서 불가에서 이런 연구를 지속하는 것은 위험하고 연구의 은밀한 추진도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세종에게 은밀히 보고했고, 세종은 그 놀라운 결과를 인식하고 백성을 위한 문자 창제의 해법을 그 속에서 이해한다.


6. 신미대사와 훈민정음의 실용 연구


효령대군의 주선으로 함허당 득통 대사와 신미대사를 만나고 그 학문적 탁월함과 실용성을 깊이 공감하였지만 

국가 정책으로 채용의 과정은 또한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정책 검토를 촉진하기 위하여 어머니 원경왕후 위령을 명분으로 내불당을 건축하고 

 **신미대사(信眉大師)**가 1438년 내불당 불사(佛事)를 계기로 입궐하여 세종과 정책화 전략을 협의하고 교류했다.

이때 신미대사는 불교의 범자 음운 이론과 표기 체계를 바탕한 훈민정음의 체게와 언어학적 지식을 세종에게 자문하고 

국가 혁신 대중 교육의 실용적 문자 창제 방안을 협의하고 실무적인 문제도 체계적으로 준비 했다.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1443년 훈민정음 초록을 완성하고 어전 회의에서 창제를 공표했다, 

바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한 문제제기와 외교적 문제 등의 거센 반발과 창제자? 배후의 연구자에 대한 위험이 극심해졌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단독 창제와 훈민정음의 학문적 가치를 강조하며 반대를 물리치고 해례 본 및 실용성 홍보를 위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을 제작하고 

홍무정운 역훈과 동국정운의 편집을 지시하여 국가적 지원체계를 준비하고 

1446년 《훈민정음해례본》을 500부 출판하고 반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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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당시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와 정치적 저항이 있었으나, 

세종은 백성을 위한 교육·문화 혁신의 신념으로 이를 밀고 나갔다.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 발명이 아닌, 동서 문명 교류의 산물이며 불교·유학·음운학의 총합적 성취였다.

인간의 언어 기능 역할에 대한 높은 철학적 직관으로 정음 원리의 인간 공학적 기준 기초를 명확히하고 

높은 교양 인문학 지식을 기반으로 수학적 위상 수학, 가점의 원리를 통한 단계적 음운 분류로 

복잡한 소리현상을 천지인체계와 5성기관 단계별 변환 현상으로 체계화 단순화하고 수학적 모형으로 만들었다.  

현대 첨단 정보과학이 추구하는 언어 모형의 중심 이론이되고 다양한 응용기술의 기준으로 

인공지능 정보 확장 체계와 음성인식 파동 이론의 핵심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세상의 다양한 문자 표기의 핵심 가치를 정음 기반으로 재정의하고 

다양한 문화 지역의 지식, 기성 관념화된 지식의 통합 협력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7. 결론


한국어는 정음 창제 이후 500년간의 실용 연구와 사전적 정비, 사회적 갈등을 거쳐 발전하였고, 

근대 이후 서구의 문법학·음운학·출판 기술의 도입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의 정보 과학 언어로서 한국어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하늘이 내린 신기술과 인간의 창조적 융합이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탄생은 단순히 한 왕의 업적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누적된 동서 문명 교류, 강론과 경전에 능통한 불교 언어학자,

 그리고 세계적 제국 정책을 주도한 고려 학자들의 세계적 지식의 집성체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 이 돈 규, 이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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